다비치라고 하는 그룹의 가수 강민경이 입은 셔츠가 커뮤니티를 통해서 화제가 되었다. 원래 나는 이런 연예인들의 옷차림에 그닥 관심을 가지고 보는 편은 아니지만 최근 들어서 연예인들이 입는 옷들을 찾아보고 그들이 입은 브랜드가 어디 브랜드인지 찾아보고 있다. 커뮤니티에 올라온 다비치 강민경의 셔츠에 대한 반응은 대체로 이렇다. 옷을 어떻게 입은거지?를 시작으로 저런 옷을 왜입나 어떤 의도 인지 모르겠다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뭐 쓰잘데기 없는 반응을 차치하고 나서 그저 단순히 그녀의 옷을 바라보자면 블로그를 통해 한번 소개했던 적이 있었던 뎀나 바잘리아가 전개하는 발렌시아가의 셔츠 티셔츠의 이미지가 연상됨과 동시에 시크한 분위기 그리고 흔하지 않지만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데일리웨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약간의 서칭을 해보니 그녀가 입은 셔츠는 바로 알렉산더 왕의 핀스트라이프 하이브리드 셔츠라고 한다. 독특한 핀 스트라이프 하이브리드 셔츠는 바디 수트의 형태로 이번 2018 SS 시즌 출시된 제품이다. 럭셔리한 핀스트라이프 셔츠와 캐미솔 형태의 바디 수트는 꽤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캐미솔에 대해 남성들은 잘 몰라 짧게 설명해보면 소매가 달리지 않은 여성용 속옷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는 어깨를 덮는 형태였지만 조금씩 어깨에 걸치는 형태로 잠옷 대용으로 대체로 활용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최근 이 캐미솔 형태의 원피스나 상의를 입고 재킷을 매치하여 입는 여성들이 자주 눈에 보인다. 역시 알렉산더 왕의 제품이구나 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시크한 스타일이다. 알렉산더 왕의 분위기와 스타일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상당히 독특하지만 그렇다고 입지 못할 수준은 아니며 꽤 유니크한 디자인. 상업적이며 미니멀한 디자인의 알렉산더 왕의 취향이 그대로 드러나는 제품이다. 물론 좋게 말하면 깔끔하지만 저런 옷을 저 가격에 누가 사입냐를 의문을 들게 하는 것이 알렉산더 왕의 옷들이다. 강민경이 입은 하이브리드 셔츠의 가격은 130만원대의 가격에 판매되고 있다. 꽤 비싼 편이지만 그녀에게는 그닥 비싼 옷은 아닐것으로 생각된다. 대만계 미국인 출신으로 뉴욕 파슨스에서 수학하고 디자이너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한 알렉산더 왕은 2012년 니콜라 게스키에르의 후임으로 발렌시아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 하여 활동하였고 2015년 해임되었다. 여전히 그의 브랜드를 여성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있는 브랜드로 꼽히며 2016년 그의 브랜드 알렉산더 왕은 10주년을 맞이한다. 그런 그도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팔기 위해 여러 매장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초창기 오프닝 세레모니가 그의 능력을 알아보았고 그의 첫 런웨이 쇼는 2006년 처음 펼쳐지게 된다. 3년정도가 지나 자신의 브랜드가 높은 인기를 얻자 권위 있는 미국의 패션 시상식인 CFDA/VOGUE를 통해 펀드를 받았을정도이니 그의 능력은 여전히 현재 진행중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나는 시계를 차고 다니지 않는다. 하지만 롤렉스의 서브마리너라면 차고 다니고 싶다. 이 이상이나 이하의 제품은 차고 다니고 싶지 않다고 해야하나. 시계에 특별한 욕심은 없고 그저 로렉스의 서브마리너라면 될 것 같다. 돈을 많이 벌어야 하겠지만 이 시계가 남자들에게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 아마 어제 포스팅한 에르메스의 버킨백과 비슷하다고 해야할까? 시간이 지날 수록 가치가 더해지고 남성의 멋을 더해주는 엄청난 값어치의 브랜드라고 감히 이야기 할 수 있겠다. 물론 이 롤렉스 서브마리너보다 비싼 시계는 많다. 하지만 좋은 시계 브랜드를 떠올릴때 많은 남성들이 롤렉스를 이야기 한다. 누구나 가지고 싶고 누구나 알고 있는 브랜드가 롤렉스인 것이다. 1905년 독일 출신의 한스 빌도르프가 알프레드 데이비스와 세운 시계 회사를 시작으로 작고 정밀한 무브먼트를 탑재한 시계를 선보인다. 1945년에는 날짜를 표시하는 데이저스트를 1953년에는 세계 최초로 100m 방수가 되는 서브마리너를 출시한다. 이 제품들은 아직까지도 소재나 기능의 개선을 더한 것외에는 변함없이 생산되는 클래식으로 자리매김했다. 롤렉스의 모든 무브먼트는 자체 제작이며 스틸 소재는 부식에 강하고 단단한 904L 스틸만 사용한다. 



얼마전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는 탁월한 시계의 저녁이라는 주제로 1950년대 롤렉스의 서브마리너가 경매에 출품되었다. 백만 달러 정도의 경매가를 시작으로 7백만 달러에 낙찰되었다. 물론 정확한 낙찰가격을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핻 80억이 넘는 어마어마한 가격에 낙찰된 것이다. 캐나다의 여행가가 소지한 50년대 서브마리너는 컨디션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롤렉스 라는 브랜드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얼마전 언론을 통해 전설적인 영화 배우 스티브 맥퀸의 롤렉스 서브마리너가 10월 출품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전 경매를 통해 라이벌었던 영화 배우 폴 뉴먼의 롤렉스 데이토나가 191억원의 기록을 과연 뛰어 넘을 수 있을지에 대해 많은이들의 관심이 집중 되고 있다. 스티브 맥퀸은 1964년에 제작된 서브마리너를 구입했고 이것은 자신의 작품에서 대역을 담당한 스턴트맨 제인스 로렌에게 선물로 주었다. 제인스는 이 시계를 소중히 보관했지만 2016년 산불로 집을 잃으면서 이 시계 또한 잃어버린다. 비버리힐즈의 기념품 수집가는 제인스 집이 불타 중요한 물건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제인스의 아내와 딸에게 연락 무언가를 찾아 낼 수 이다고 설득, 결국 딸이 소실된 집에서 스티브 맥퀸이 선물로 준 서브마리너를 찾아 냈다. 물에는 강하지만 강한 불에 시계는 멈추게 되었고 롤렉스 본사에서 직접 복원 과정을 거치게 된다. 경매를 주관하는 필립스는 이 시계의 가치는 3억에서 6억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이 가격은 스티브 맥퀸이라는 배우를 생각했을때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이고 아마도 폴 뉴먼의 데이토나 만큼이나 높은 가격으로 낙찰될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가치가 이 시계가 잘 말해준다.


자드(ZARD). 그녀를 사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최근 몇달 사이 그녀가 활동했던 90년대의 제이팝을 다시 들으면서 중 조금씩 그녀가 활동했던 모습이나 노래를 듣고 있다. 물론 어린시절 그녀가 부른 애니메이션의 OST를 통해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90년대 제이팝의 전설이라고 불리며 경제불황으로 어렵던 일본인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었던 사람. 그래서일까 그녀의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오늘이 바로 그녀가 세상을 떠난지 11년이 되는 날이다. 2007년 5월 27일 산책 도중 갑작스러운 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많은 이들이 그녀의 죽음을 슬퍼한다. 그러니까 자드는 그녀가 소속된 밴드였고 1993년 멤버들이 모두 탈퇴한다. 데뷔 하고 나서 엄청 왕성한 활동을 하지만 TV에 출연하는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유튜브를 보면 그녀가 처음 방송 출연을 하는 영상이 있는데 정말 떨고 있는 모습이 그대로 보일정도. 사실 2000년대 중반 일본의 가수가 우리나라 팬들에 그닥 큰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달랐다. 2006년 10월 발매되었던 Golden Best~15th Anniversary의 한국 흥행 소식에 ZARD가 직접 한국 팬들에게 감사 메세지를 보내며 많은 호응을 얻었다. 락 밴드 소속으로 활동 하기 이전에는 수려한 외모를 바탕으로 레이싱팀 모델이나 여러 잡지나 전화 카드의 모델로도 활동했다. 이것으로 인해 수많은 루머와 악의적인 보도가 그녀를 힘들게 하기도 했다. 93년부터 97년까지는 그녀가 가장 인기있던 시절로 불리는데, 그녀가 발표했던 싱글이 모조리 차트에 순위를 올리거나 1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다. 이 시기 엄청난 활동으로 건강에 큰 무리가 오게 된다. 97년부터 99년까지 대체로 아무로 나미에 같은 댄스가수가 인기를 끌며 주목도가 줄었다. 물론 음반 판매량은 300만장이 넘으면서 여전히 인기가 좋았지만 새롭게 치고 올라오는 신인들과 건강상의 이유로 잠시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짧은 활동 중단 이후 새롭게 활동을 재개했지만 갑작스럽게 쓰러졌고 그녀는 암 판정을 받아 투병하게된다. 여러번의 항암치료를 극복하고 복귀를 위해 노력하였지만 갑작스러운 사고로 사망하게 된다. 구글에 그녀의 이름을 검색해보면 정말 다양한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다. 모델 활동 당시의 모습과 지금은 돈이 있어도 구하지 못한다는 그녀의 사진집 그리고 그가 활동했던 모습들까지 다양하게 확인 할 수 있다. 꽤 매력적으로 느꼈던 모습은 가벼운 티셔츠와 데님을 매치한 모습이다. 최근의 트렌드와 비교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가벼운 체크 셔츠와 기분 좋은 스케이트 보드 브랜드의 티셔츠를 착용하고 있다. 그녀가 착용하고 있는 리얼 스케이트보드는 199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스케이트보드 브랜드로 덱(DECK)과 어패럴을 생산하는브랜드이다. 이외에도 그녀는 나이키나 DKNY그리고 일본의 DC브랜드를 자주 착용한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다.

아직 어려서인지 몰라도 마이클 잭슨이라는 사람에 대해 그리 깊게 알지 못한다. 단지 그를 기억하는 것은 그를 지칭하는 별명과 몇가지 장면에서의 모습들이 대부분이었다. 팝의 황제(KING OF POP)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대중 음악의 혁명을 일으킨 진정한 신화이자 전설이라고 불린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혹독한 교육아래 가수 생활을 시작한 그는 잭슨 파이브로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보이 밴드의 메인 보컬에서 팝의 황제로 등극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거대한 야망을 가진 아티스트라고 전해진다. 그 당시만 해도 팝음악에서는 딱히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지 못한 퀸시존스를 프로듀서로 만나 첫번째 앨범 OFF THE WALL을 함꼐 제작했고 1000만장넘는 판매고를 올리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엄청난 판매고를 올림에도 불구하고 많은 상을 받지 못하자 그는 자신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하나 하는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 황제의 자존심을 건드린 문화계 전반의 인종 차별은 대중 음악 역사상 가장 중요한 순간을 만들어낸다. 바로 그가 진정으로 팝의 황제라는 것을 인정받게 되는 순간이었다.



가장 성공한 스타가 되기를 원했던 마이클 잭슨이 자신의 모든 바람을 이루었던 순간이자 영원한 전설로 올라 설 수 있게 된 1982년 자신의 2번째 앨범 스릴러(Thriller)를 발표한다. 듣는 음악은 그를 계기로 보는 음악으로 바뀐다. 시대를 바꾼 노래라고 평가받는 빌리진은 마이클 잭슨의 상징과도 같은 곡으로 평가받는다. 음악 채널 VH1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궁극의 No.1'에서도 1위로 선정된다. 빌리진에서 선보인 발목이 보이는 검은색 일자바지 주름진 하얀 양말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로 자리잡게 된다. 빌리진은 마이클 잭슨이 직접 작사 작곡을 맡은 곡이며 그의 보컬적 능력과 화려한 퍼포먼스를 표현한다. 그렇다 마이클 잭슨이 곧 빌리진이며 빌리진이 마이클 잭슨이다. 그는 그의 댄스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기억에 남는 춤인 문워크(Moonwalk)를 선보인다. 스티비원더는 자신이 눈을 뜨게 된다면 딸의 얼굴을 가장 먼저 보고싶고 두번째로 그의 문워크를 보고 싶다고 했을 정도이다. 


미국 GWS옥션은 얼마전 마이클잭슨이 가장 먼저 빌리진 무대를 선보였던 1983년 MOTOWN 25주년 무대에서 그가 신었던 로퍼 한점을 경매로 내놓았다. 그의 신발은 안무가였던 레스터 윌슨이 가지고 있었으며 시간이 오래되었지만 좋은 상태를 보인다고 밝혔다. 마이클 잭슨은 이 신발을 마법의 신발이라고 했고 최초 경매 가격은 1만달러 우리돈으로 약 1069만원으로 책정되었다고 한다. 누군가에게는 비쌀수 있지만 마이클 잭슨의 팬들에게 1만달러는 굉장히 적은 액수일 수도 있을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사진에 보이는 이 신발이 그가 첫번째 문워크 무대에서 신었던 로퍼이다. 브랜드는 미국의 플로쉐임(FLORSHEIM) 역사가 깊은 슈즈브랜드이다. 1892년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밀튼 플로쉐임 씨와 아버지에 의해 시작된 플로쉐임은 드레스 슈즈부터 캐주얼까지 폭넓개 전개하면서 이름을 얻었고 저렴한 캐주얼 라인부터 임페리얼 같은 최고급 가죽 소재를 활용하는 라인까지 다양하게 전개하였다. 마이클 잭슨이 신은 이 로퍼는 최상급의 가죽을 사용한 임페리얼 라인의 제품으로 알려져있다. 또한 60년대 아이비 리그 학생들이 가장 많이 신었던 신발 브랜드 중 하나로 꼽히곤 한다. 단순히 플로쉐임의 로퍼를 보았을때 그저 오래된 신발이구나 생각할 수 있지만 마이클 잭슨이라는 전설이 착용했다고 하니 달라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마법같은 그의 문워크가 플로쉐임의 로퍼였다는 궁금증이 풀리는 한편 그의 로퍼가 과연 어떤 가격에 낙찰될지도 궁금해진다.


흑인 음악 그중에서도 힙합은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주류음악이다. 힘들다고는 하지만 고등래퍼나 쇼미더머니 같은 프로그램이 끝난 후 스트리밍 사이트에는 그들의 음악이 상위권을 차지한다. 실력있는 래퍼들은 많고 그곳에서 자신만의 색을 찾고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 승부하는 래퍼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은 고무적이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때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지금은 일상이 되었다. 소울컴퍼니가 내놓은 앨범이나 더콰이엇 키비 화나 팔로알토 각나그네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던 2000년대 초중반의 음악은 확실히 미숙한 부분과 그시대만 느낄 수 있는 감성이 존재했다. 힙합플레이야 같은 커뮤니티에서 활동했고 수백장의 앨범을 구입하며 취미로서 혹은 생활의 일부분으로 힙합 음악을 들었었다. 나이가 들고 조금씩 음악에 소홀해지더니 지금은 전혀 관심이 없는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그때를 생각하며 가끔씩 더콰이엇의 1집을 듣곤 한다.  


개인적으로 국내 힙합을 즐겨듣긴 했지만 미국 본토의 힙합을 듣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투팍의 이름은 그 당시 처음 듣게 된다. 이미 내가 힙합이라는 음악을 접할때 그는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단지 영상이나 음악으로 아니면 그가 펴낸 시집으로 그가 살아온 날들을 조금이나마 느끼곤 했다. 힙합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심볼이자, notorious b.i.g와 함께 힙합의 양대산맥으로 군림하며 '서부의 왕' 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던 투팍. 잉카의 마지막 황제 투팍 아마루에서 따온 그의 이름은 2pac 이라고도 불린다. 래퍼와 프로듀서로서 꾸준히 활동하면서 동시에 영화배우로서 활동도 시작하는데 내 네이버 블로그에서 그가 출연한 갱스터랩(juice) 이라는 영화를 소개했던 적이 있다. 그 영화는 힙합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영화로 평가받는다. 




사진 속 투팍의 모습은 1994년 영화 할렘 덩크(Above The Rim)에서의 모습이다. 옴브레 체크 라고 불리우는 셔츠를 입고 있는 모습인데, 최근 이 옴브레 체크를 활용한 아이템을 수도 없이 많이 볼 수 있다. 한가지 색의 농담으로 된 격자 무늬로서 기본이 되는 선의 한쪽이나 또는 양쪽이 점차 바탕색에 녹아들어가는 것 같은 잘 조화된 것을 말한다.  여성용의 모직물에 특히 자주 사용되었지만 최근에는 남성용 셔츠의 이미지로 자주 확인 할 수있다. 60년대 빈티지 셔츠에서 자주 보이는 체크 패턴인데 최근 다시 주목을 받으면서 와코마리아나 랙스 맥그리거 같은 수준 높은 일본의 브랜드 그리고 비바스튜디오 미스치프 같은 국내 브랜드에서도 이 옹브레 체크를 활용한 셔츠나 아이템을 확인 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이 체크 셔츠가 올드해보이고 촌스러워 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버팔로 체크 셔츠 처럼 확실하게 각인되는 체크가 아닌 경계가 흐릿한 패턴의 셔츠가 좀 더 다양한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체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폴 뉴먼(Paul Newman). 요즘 사람들이야 거의 대부분 모르는 영화배우. 우리가 스타일 아이콘으로 잘 알고 있는 스티브 맥퀸과 동시대에 활동한 엄청 유명한 배우이다. 아마 스티브 맥퀸 보다 더 잘나갔다고 해야겠지. 어쨌든 그들은 세기의 라이벌 이라고도 불렸는데 함께 출연한 영화 <타워링>에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공동 주연으로 출연하였지만 포스터의 이름 위치를 두고 싸웠다면 이해할 수 있을까? 포스터에는 스티브맥퀸의 이름을 가장 좌측에 그리고 폴 뉴먼의 이름을 그 다음에 놓는 대신 맥퀸 보다 살짝 높게 위치시킨것을 확인 할 수 있다. 또한 스티브 맥퀸의 대사량이 폴 뉴먼 보다 많았는데 그와 동등한 위치에서 연기 대결을 펼치고 싶다고 하여 대본량을 줄여달라는 이야기도 했을 만큼 스티브 맥퀸은 폴 뉴먼을 라이벌로 여겼다. 상대적으로 맥퀸이 무명이었을때 그는 잘나가던 스타였고 여러부분에서 열등감 아닌 열등감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라이벌 관계라는것이 언론의 장난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폴 뉴먼이 <내일을 향해 쏴라>에서 부치 캐시디 역으로 캐스팅 되었을때, 맥퀸을 직접 찾아가 선댄스 키드역을 제안하기도 했을 만큼 둘의 사이는 크게 나빴다고 하긴 어려울 것 같다. 맥퀸이 일찍 사망하고 폴 뉴먼은 "사람들은 나를 핫(hot)한 남자라고 불렀지만, 나에게는 부담스런 짐이었다. 맥퀸이 쿨한 척 산 것처럼, 나 역시 겉으로만 뜨거운 남자인 척 행동했다" 라고 이야기 했을정도로 라이벌 관계와 배우로서의 삶에 부담을 느꼈다. 




배우로서의 화려한 삶 뿐만 아니라 외적으로도 꽤 모범적으로 살아온 사람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무명 시절 잠깐 결혼했다가 이혼한 이 후 두번째 부인과 결혼 하고 50년동안 한번의 스캔들도 없었고 헐리우드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혐오했으며 자신이 특권을 누리고 막대한 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행운에 가까웠다며 내가 얻은 부를 어려운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을 당연히 여겼다. 비영리 식품 회사인 Newman's Own 을 설립하여 2억달러 이상 기부하였고 그가 사망한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흑백 영화 시절에도 푸르고 아름다운 눈 덕분에 더욱 주목 받았던 배우. 자주는 아니더라도 그의 이미지를 찾고 옷차림에 영감을 받곤 하는데 특히 아메리칸 캐주얼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전설적인 사진으로 통하는 덱자켓을 입은 뉴먼의 사진은 여전히 회자되곤 한다. 사진은 자주 봤지만 누군지 몰랐던 사람이라면 지금이라도 기억해두자.


어제였다 어떤 블로그를 통해 그의 사진을 보았는데 그의 푸른 눈 만큼이나 청량한 스트라이프 셔츠를 입고 나온 모습을 보았다. 너무 멋져보인다. 원래 저런 굵은 스트라이프는 웬만하면 요즘에는 잘 입지 않는 스타일의 셔츠인데, 폴 뉴먼이 입으니 조금은 달라보이는 것 같더라. 시대에 따라 스트라이프 패턴도 유행이 달라지는데 저런 굵기의 스트라이프는 조금 보기 힘들었다. 아예 더 두껍거나 아니면 더 얇은 굵기의 스트라이프가 좀 더 각광받는 듯 하다. 그래서 폴 뉴먼이 착용한 스트라이프의 명칭이 있는지에 대해 좀 살펴보았는데 조금 재밌는 부처 스트라이프(Buther Stripe) 라는 단어가 있다. 




보그의 포토그래퍼 어빙 펜이 촬영한 1950년대 런던의 정육업자의 모습이다. 고기 뼈를 발라내는 일을 하는 사람이고, 두꺼운 앞치마와 흰색 셔츠 그리고 넥타이 까지 맨걸 확인할 수 있다. 거기에 꽤 선명한 스트라이프 패턴의 자켓을 입고 있는데 이 모습을 일컬어 부처 스트라이프라고 부르는 듯 하다. 오래전 영국에서 정육점의 유니폼이나, 모자 , 앞치마 등에 활용된 모습을 확인 할 수 있고 지금도 꾸준히 부처 스트라이프 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활용되는 듯 하다. 청량한 블루 컬러의 셔츠와는 이미지가 사뭇 달라보이지만 단품으로 입거나 무늬가 없는 니트 타이와 매치하면 꽤 좋아보이는 셔츠이다. 캐주얼한 느낌에 좀 더 점수를 주고 싶고 웬만하면 수트와 함께 연출하는건 조금 답답해 보이는 인상이 있는 듯 하다. 



좋아하는 여배우를 이야기 할때 이 사람을 이야기 한다. 오래전부터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과 썩 나쁘지 않은 연기력 그리고 화제를 몰고 다니는 스캔들과 약간의 악녀같은 이미지 배우로서의 매력은 충분한 사람이었다. 바로 위노나 라이더. 대체 나이가 몇이야?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지금 바로 구글에서 위노나 라이더의 이름만 쳐봐도 그녀가 얼마나 매력적인 얼굴을 하고 있는지 또 얼마나 매력적인 옷차림을 하고 다녔는지 확실히 느낄수 있을 것이다. 오버롤즈 네이버 블로그에서 꽤 자주 사진을 올리기도 했지만 그녀에 대해 글을 쓰는 건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뭐 국내에서도 꽤 인기가 좋지만 그래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녀를 이야기 할떄 가위손이나 에일리언4에서의 짧은 머리 등 여러 영화와 장면들을 이야기 해주어야 아 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1971년 미네소타에서 성장한 그녀는 어린 나이에 데이빗 셀처 감독의 영화 <루카스>를 통해 어린 나이에 데뷔한다. 그 중에서 그녀의 이름을 알릴 수 있었던 작품이 바로 팀 버튼 감독의 <비틀쥬스>인데 영화가 대박이 나면서 덩달아 이름값도 올라가게 된다. 이 후 팀 버튼 감독과 다시 만나 <가위손> 이라는 영화를 찍었고 한때는 연인 관계였던 조니 뎁을 만난다. 



주가는 계속해서 올라간다. 당대의 명감독들과 차례대로 작품을 했고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순수의 시대>를 통해 골든글로브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는 등 배우로서 인정받게 된다. 물론 그녀가 출연한 대다수의 영화가 상업적인 성과가 미미했던 경우가 많았지만 워낙 매력적인 얼굴과 연기자로서의 아우라 덕분인지 명감독들의 캐스팅은 끊이질 않는다. 이 후 많은 팬들을 실망하게 한 절도 혐의로 배우로서 쌓아온 이미지와 커리어가 와르르 무너지는 일이 발생하고야 만다. 위선자라는 별명과 함께. 나도 원래 그녀에 대해 오래전부터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녀가 출연한 비틀쥬스나 에일리언4에서의 매력적인 숏컷에 매료되어 조금씩 그녀의 작품을 찾아보곤 했었다. 거기다가 옷도 정말 잘입어서 남자인 나에게 있어서도 꽤 많은 영감을 주기도 했다. 유명인들의 옷차림을 소개하는 카테고리를 통해 이야기하는 그녀의 착장은 지금의 흐름과 비교해보아도 전혀 꿇릴것 없는 스타일을 하고 있다. 




발목정도 길이로 살짝 접어올린 루즈한 셀비지 데님과 가벼운 차콜 그레이 컬러의 크루넥 셔츠 그리고 LA 다저스의 베이스볼 캡 까지 요즘의 이미지는 모두 소화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모습이 언제냐고? 1989년 캘리포니아에서 파파라치에 의해 촬영된 사진이다. 아마 어떤 행사장 인듯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운 복장을 하고 온 그녀의 쿨함이 멋져보인다. 이외에도 가죽 라이더 자켓을 입거나 여성스러운 연한 핑크 컬러의 니트를 착용하고 나와 스타일의 폭이 굉장히 넓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오늘 이야기할 그녀가 입고 있는 짙은 퍼플 컬러 일본 사람들은 이 색을 가지색 같은 남색(茄子紺)이라고도 표현하기도 하더라. 어쩄든 그녀가 입고 있는 자켓은 미 해군이 60년대 중반부터 채용하여 70년대 까지 취급한 유틸리티 자켓(Utility Jacket)이다. 간단한 갑판에서의 작업에서도 활용되었지만 대체로 실내업무에서 착용했던 자켓이라고 한다. 지퍼와 버튼 2중 구조로 여밀수 있고 계절은 동계절용이 아닌 춘추용으로 활용되었다. 이 후 리얼맥코이 같은 복각 메이커에서 출시하기도 했고 일본의 빈티지 사이트에서 꽤 자주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다. 넉넉한 오버핏의 유틸리티 자켓을 착용한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영국적인 브릿팝의 정수를 보여준 블러의 [파크라이프]는 발표되자 마자 큰 반항을 일으키며 영국 전역을 떠들썩 하게 한다. 너무도 영국적이라는 이유 만으로 미국에서의 흥행에는 실패하지만 결국 수많은 브릿팝 팬들을 양산하는 결과를 낳는다. 오아시스 이전 우리나라에서도 블러의 팬들은 꽤 많았다고 전하니 그들의 인기를 조금이나마 실감해본다. 파크라이프에서는 모즈족의 모습을 담은 영화 콰드로패니아의 주인공 필 다니엘스가 내레이션을 맡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아티스트 부모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악기를 배운 보컬 데이먼 알반의 경우 잘생긴 외모로 원래는 배우를 하고 싶어 했지만 잘되지 않았고 블러에 올인하게 된다. 90년대 영국 밴드의 영상을 살펴보면 특히나 자주 보이는 아이템들이 있는데 휠라나 아디다스 카파 같은 스포츠 웨어를 자주 착용하고 나오는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축구가 워낙 인기 스포츠인 나라이고, 데이먼 알반의 경우에도 첼시의 광팬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파크라이프 뮤직비디오 속 데이먼 알반은 참 잘생겼다. 거기에 꽤 백수 티 팍팍 나는 트랙탑을 바짝 올려 입고 있는데 이 패션을 일컬어 모즈나 네오모즈에서 파생된 캐주얼즈(CASUALS) 라고 부른다. 영국의 스포츠 패션과 문화의 움직임에서 빠질 수 없는 단어인 캐주얼즈는 프레드 페리를 기점으로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전성기를 보내고 90년대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이야기 한다. 축구 팬의 패션이 각광을 받고 영국 전역에 퍼졌으며 트랙탑(저지)이나 나일론 자켓, 트레이너 라고 불렸던 운동화를 중심으로 한 스타일 이다. 지금이야 스포츠 웨어가 일상복으로 자리 잡았지만 그떄만 해도 그렇게 입는 것이 꽤나 쿨했다고 하니 세상이 참 달라졌다고 할수있다. 블러의 데이먼 알반은 뮤직비디오에서 슬레진저의 트랙탑을 착용한다. 슬레진저? 지금 우리나라에서 시장이나 위X프 같은 사이트를 통해 판매되고 싸구려로 취급받는 그 옷? 맞다. 지금은 이미지가 어찌된 영문인지 나쁘지만 우리나라에서 80년대 처음 삼성물산을 통해 라이센스 수입되어 공급되었을 만큼 이름값했던 브랜드였다. 어느샌가 국내 이미지가 완전 땅바닥으로 떨어져 로고부터 시작해서 푸마의 짝퉁 취급을 받는 입장이 되었지만 그쪽 동네에서는 역사가 깊은 브랜드라고 할 수 있다.






 



슬레진저(Slazenger).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스포츠 용품 브랜드가 바로 영국의 슬레진저이다. 랄프 슬레진저, 앨버트 슬레진저 라는 유대인 형제에 의해 1881년 설립되었고 처음에는 테니스 공을 만들어 판매하는 브랜드 였다고 한다 (1902년부터 지금까지 윔블던 대회의 테니스 공을 납품). 또한 테니스, 크리켓, 골프에 이르는 장비와 의류를 생산하고 있는 나이로 보면 형님 격 브랜드. 사실 국내에서의 이미지가 굉장히 저가 용품 그리고 티비 홈쇼핑 에서나 나오는 쉬운 제품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해외에서의 인지도는 나름 인지도 있는 브랜드라고 할 수 있겠다. 90년대 영국의 락밴드의 영상을 조심스레 들춰보면 트랙탑을 입고 노래하는 친구들이 꽤 많이 보이는데 대표적으로 오아시스의 노엘 갤러거는 Don't Look Back In Anger 뮤직비디오에서 알반이 입는 비슷한 트랙탑을 입고 출연한다. 아마도 늦은 80년대 아니면 90년대 초반에 제작되었을법한 슬레진저의 트랙탑은 2010년 새롭게 헤리티지 라인으로 출시되기도 했다. 시기상으로 너무 이른감이 없지 않아 있다. 최근 헤리티지 흐름에 편승했더라면 꽤 주목을 받을수 있었을 텐데 조금 아쉽다. 



일본 여행을 자주가는 사람들 중 패션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많다. 여러 브랜드를 꼽을 수 있지만 꼼 데 가르송의 플레이 라인은 특히 인기 있는 브랜드 중 하나이다. 눈이 달린 하트 로고, 만화 캐릭터 같은 귀여운 로고는 기본 중에 기본인 가디건과 티셔츠를 단숨에 스타일리시한 아이템으로 만들어주는 마력을 가진 로고 중 하나이다. 물론 품질과 관련해서 여러 사람들의 혹평이 들려오고 있긴 하지만 그들의 로고 플레이는 어떤 브랜드 보다도 대단하다고 생각해왔다. 단순한 로고로 어마어마한 인기 몰이를 하는 꼼 데 가르송은 대체 어떤 이에 의해서 전개되고 있는 것인가. 




레이 가와쿠보. 그녀가 처음 꼼 데 가르송이라는 이름의 브랜드를 설립한 것이 1969년. 곧있으면 50년을 바라보고 있는, 일본을 대표하는 패션 하우스로서의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다. 전위적이고 파격적인 스타일, 히로시마 쇼크라고 불릴 정도로 꼼 데 가르송은 기존에 없던 디자인을 보여주며 우리가 생각해온 선입견을 모조리 박살내는 충격적인 디자인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하트 로고가 박힌 플레이 라인은 꼼 데 가르송의 극히 일부분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그들의 대체로 예술적인 아방가르드한 의상을 선보인다. 물론 그녀는 꼼 데 가르송 뿐만 아니라 후학 양성에도 힘을 쏟고 있다. 이미 레이 가와쿠보 만큼이나 유명한 디자이너 준야 와타나베를 시작으로, 구리하라 다오, 후미토 간류 등이 함께 꼼 데 가르송이라는 하우스를 전개중이다. 또한 꼼 데 가르송의 소속은 아니지만 언더커버의 준 다카하시 또한 파리 컬렉션 데뷔에 그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고 , 고샤 루프친스키의 재능을 알아본 그녀는 도버 스트릿 마켓을 통해 그들의 옷을 입점 시켜 지금의 유스컬쳐 트렌드를 부각시킨 인물로도 평가받는다. 



좀처럼 매스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덕분에 그녀에 대해 크게 알려진바는 없지만 최근의 모습들에서 그녀가 사랑하는 몇가지의 아이템을 확인 해볼 수는 있겠다. 꼼 데 가르송 자체가 블랙을 기초로 하는 브랜드 답게 그녀 또한 블랙을 매우 사랑한다. 확인 할 수 있는 모든 옷차림에서 블랙이 없는 모습을 확인 하기는 어렵다. 또한 그녀의 옷차림에서 유난히도 자주 보이는 아이템. 가죽 재킷. 그녀의 가죽 재킷은 과연 어떤 브랜드이며 왜 그녀가 그토록 자주 입는 것일까.좋은 품질의 라이더 재킷을 소장하는 것. 많은 이들의 꿈일것이다. 수백만원이 호가하더라도 오래 사용할 수 있는 가죽 재킷 특유의 매력이 있기 떄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가의 가격을 감안하고서라도 구입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봄이나 가을이 되면 라이더 재킷에 대한 문의와 구입이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그녀는 꼼 데 가르송을 전개하면서 영국의 루이스 레더(Lewis Leathers)와 함께 협업하기도 하였으며 루이스 레더의 라이더를 착용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1892년 영국에서 설립된 루이스 레더는 처음부터 가죽 재킷을 취급하던 곳은 아니었다. 세계대전 당시 영국 공군(RAF)의 의뢰를 받아 좋은 품질의 비행 재킷을 생산하던 브랜드 였다고 한다. 1930년대 영국은 바이크 문화가 급속도로 발전하던 시기. 오래전부터 군복을 생산하던 기술력을 바탕으로 그들은 조금씩 라이더 재킷의 높은 수요를 예상 주문에 돌입하게 된다. 루이스 레더의 생각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고 수많은 바이크 수요자들에게 루이스 레더의 라이더 자켓은 당연히 구입해야 하는 필수 아이템으로 자리매김한다. 영국군이 보증하는 품질 문서와 보온성과 내구성을 바탕으로 한 라이더 재킷은 그렇게 전설적인 브랜드의 시작을 알리게 된다.



어마어마한 인기가 계속된다. 그들은 영국을 넘어 미국의 시장 진출을 위해 미국인 디자이너 버드건을 영입 거칠고 투박한 라이더 재킷인 브롱스(BRONX)를 제작 발표 하게 된다. 브롱스의 등장은 미국의 젊은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고 훗날 유명한 펑크 , 록 밴드들의 유니폼으로도 승격 수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다.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 섹스 피스톨즈의 시드 비셔스 같은 록의 역사를 함께한 뮤지션이 착용한 모습을 다양한 매체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레이 가와쿠보 또한 라이더 재킷 그중에서도 루이스 레더에 대한 강렬한 팬으로 알려져 있다. 꼼 데 가르송을 통해 그녀는 루이스 레더와 협업한 라이더 재킷을 출시하기도 하였으며 협업 제품을 착용하고 등장하여 화제가 되었다. 일본에서 루이스 레더가 유행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녀의 영향력 덕분이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정확히 그녀가 자주 입는 여러 스타일의 라이더 재킷이 루이스 레더라고 확신 할 수는 없지만 블랙을 기본으로 하는 라이더 재킷을 블랙을 기본으로 하는 꼼 데 가르송의 디자이너가 사랑하는것은 큰 이유가 없을 수도 있겠다. 블랙이 아니면 라이더 재킷은 설명이 불가능한 옷이니 말이다. 



유명인사들이 착용한 옷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사람들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번쯤 더 들여다 보게 된다. 어떤 이유인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심리학을 전공하는 친구에게 물어보아야 겠다. 1879년 독일 태생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아인슈타인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물리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가 무슨 업적을 남기고 어떤 행보를 보였는지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아인슈타인이라는 이름은 대부분이 안다 (우유도 아인슈타인 우유가 있을 정도) 어렸을때부터 천재였다고 전한다. 그의 번뜩이는 질문에 선생님들은 답변하지 못했고 그것이 와전되어 어렸을때에는 바보였다는 루머도 전해지지만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두뇌를 보여주었다고. 



옷을 말하는 입장에서 그의 업적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너무 힘들다. 간단하게 그의 일생을 요약해보자. 그는 유대인. 하지만 독일에서 태어났으니 1930년대 나치 치하를 견뎌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1933년 미국으로 망명을 결심하게 된다. 아인슈타인 뿐만 아니라 유태계 인물 중 상당수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주 지역으로 쫓겨 나듯이 이민을 오곤 한다. 그리하여 미국으로 건너온 아인슈타인은 프린스턴 대에서 연구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아우슈비츠 학살을 피하게 된다. 만약이라도 그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지 않고 아우슈비츠에서 생을 마감했다면 너무나도 끔찍한 일이었을 것이다. 자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보자. 가장 처음 소개한 사진은 1937년 프린스턴 대학교 내 그의 집에서 찍힌 사진이다. 시그니처와 같은 뻗친 머리와 멋진 가죽 자켓을 한벌 입고 있는데 꽤나 멋있다. 바로 리바이스에서 1935년 정도에 생산된 코사크 자켓이다. 프린스턴의 동료 교수였던 Leopold Infeld는 그가 이 자켓을 정말 자주 입었다고 이야기 하였고 자연스레 그의 자켓에 대한 관심도 올라가게 된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코사크 자켓이 생산된지 80여년이 흐른 2016년 7월 13일 영국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그가 실제로 착용했던 코사크 자켓이 출품 된다.(14만 6,744달러에 낙찰) 자 그러면 코사크(Cossack)란 무엇인가. 살펴보면 우크라이나 일대 , 러시아 서남부에서 동슬라브어를 사용하는 민족 집단이라고 하는데, 러시아에서는 카자키라고 부르고 영어를 쓰는 국가에서는 코사크 란 이름으로 불리운다. 그들은 1차 세계대전 기병대로 참전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들이 입던 자켓을 본따 리바이스에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리바이스가 무엇인가. 미국 그 자체인 브랜드가 아닌가. 그는 이 코사크 자켓을 입고 타임지(1938년 4월호)에도 소개되었을 만큼 이 자켓을 자주 입었다. 



8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의 자켓이 높은 가격에 낙찰되어 큰 화제가 되었다. 결국 리바이스는 올해 2월 아인슈타인이라는 천재 물리학자의 아이템을 복각하기에 이른다. 정식 명칭은 멘로 코사크 재킷 (Menlo Cossack Jacket). 높은 품질의 양가죽으로 제작되었고 단 500장만이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된다. 필기로 된 각각의 일련번호가 기입되어 있고, 가격은 15만엔 정도에 판매되었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에서 새로운 삶을 살았던 그를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아인슈타인의 코사크 자켓. 복각판임에도 그 가치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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