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월드컵의 결승전을 앞두고 있는프랑스 대표팀의 라인업을 살펴보면 2명의 선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아프리카나 아시아 등 프랑스 혈통이 아닌 선수들이 대다수이다. 다문화 국가로서 오랜 이민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오늘 이야기하는 이브 생 로랑에 대한 이야기 또한 프랑스가 아닌 아프리카의 알제리를 먼저 이야기 해야 한다. 1936년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 출신으로 21살의 나이인 1957년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로 패션계에 혜성같이 등장 여성 정장에 바지를 도입하거나 사파리 재킷을 출시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혁명적인 아이템들을 내놓은 그는 20세기 후반 패션을 이끌었다. 오래전의 삼성 제일 모직에서 라이센스를 받아 판매한 적이 있는데 간간히 구제시장이나 동묘에서 발견된다. 2013년 가을 겨울 시즌 디올 오므의 수장이었던 에디 슬리먼의 영입으로 남성 라인의 명칭을 생 로랑 파리로 분리하였다. 케링 그룹 소속으로 lvmh와 대립(?)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1년 무슈 이브 생 로랑에 의해 설립된 하우스를 상징하는 로고는 2018년인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다. 이브 생 로랑의 로고가 박힌 가죽 지갑은 꽤나 섹시한 분위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긴 지갑과 짧은 지갑 태블릿 케이스로 출시된 가죽 시리즈는 매우 부드러운 송아지 가죽을 채용하였고 카산드라 로고라고 불리는 이브 생 로랑 로고가 새겨져있다. 우크라이나 프랑스 혼혈의 화가이자 상업 포스터 작가, 활자체 디자이너 였던 아돌프 무롱 카상드르가 자살하기 몇 해 전 1961년 12월에 YSL로고를 만들어 냈다. 당시로선 불문율이었던 두가지의 다른 폰트를 한 단어에 적용하여 룰을 깨버리고 싶어하는 도전정신을 담았다고 알려져 있다. 카상드르는 근대 산업 디자인의 기틀을 포스터에서 회화성을 배제하고 독자적인 세계관을 개척하였다. 두 전설의 만남으로 이어진 이브 생 로랑의 로고는 특히 화장품을 통해 전세계 여성들을 통해 특히나 사랑받고 있다. 갑자기 스무살 무렵이 생각난다. 갓 대학교에 입학한 새내기였던 나는 대학 도서관에서 이브 생 로랑에 대한 책을 읽는다. 알제리 출신으로 전쟁으로 군에 입대하지만 몸이 약해 3주만에 군대에 나온 이야기를 시작으로 보그의 편집장이 소개해준 크리스찬 디올의 아래에서 일하면서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발돋움 할 수 있었던 과정까지 모든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분명히 기억하는 몇가지 이야기들이 있었다. 이미 전설적인 디자이너로서 이브 생 로랑, 생로랑이라는 두편의 영화가 제작되었다. 처음 개봉된 이브 생 로랑은 피에르 니네가 역을 맡았고 생 로랑에서는 가스파르 울리엘이 이브 생 로랑 역을 맡아 연기했다. 영화는 디자이너의 희로애락 시기인 1967년부터 1976년까지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그가 직업적으로 인정받는 시기였고 동시에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도 알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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